[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9)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편지 4통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9)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편지 4통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9) 동학농민혁명을 기록한 편지 4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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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185건 중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작성된 4통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이 편지는 원본은 아니고 필자 또는 다른 사람에 의해 필사된 것으로 작성자가 누구인지 받는 사람이 누구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다만 편지 내용에 나오는 여러 가지 지명과 등장인물을 살펴볼 때 충청도 옥천지역에서 살았던 사람임을 짐작할 수 있다. 편지를 조금 더 꼼꼼히 읽어보면 이 편지의 작성자는 1894년 당시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를 역임한 황영수(黃潁秀)의 큰형으로 짐작된다. 편지 말미에 백형(伯兄)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1894년 4월 2일 편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서울대학교 대학원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 따르면 황영수는 1889년 부사용(副司勇)으로 임명되고 이후 사과(司果)를 거쳐 1894년 4월에는 사사(司事), 1894년 5월에는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그 직후인 1894년 5월 22일 황영수가 병을 칭하여 전생서 주부의 직을 거두어 줄것을 요청하자, 국왕은서울 기숙사
빙고주부(氷庫主簿) 박주동(朴注東)과 황영수를 교체하라고 명하였고, 이것은 실행되었다. 전생서는 조선시대 나라의 제향에 쓸 양ㆍ돼지 따위를 기르는 일을 맡아보던 관아이다. 황영수의 큰형이 보낸 편지에 따르면 “지난 인편에 부친 편지를 큰 아우가 받아 보았다니 위로가 되네. 또 전생서(典牲署) 주부(主簿)로 옮겨 사은숙배(謝恩肅拜)하였으니 이미 숙직에 나아근로자학자금대출신청
갔으리라 생각하네”라고 하여 황영수가 전생서 주부로 임명되었다는 사실이 편지에서 확인된다.   이 편지들은 모두 충청도 옥천지역에 거주하는 큰형이 중앙에 진출하여 서울에서 관직에 재직하고 있는 동생 황영수에게 보낸 안부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1894년이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동학농민혁명이라는 역사적 사건에 관한 내용이 매우 상세하게 무입고자동차대출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당시 충청도 옥천과 인근지역의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으며, 이와함께 양반 지식인들이 어떻게 동학농민혁명을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알 수 있다. 1894년 4월 2일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동학의 소요가 난세보다 심해 바늘방석에 앉은 듯하네. 매일 아랫마을의 행랑에 와서 모이는데 양반들은 숨죽인 채 감히 한마리스차량담보대출
디 말도 꺼내지 못한다네. 이들이 말하기를 ‘비록 재상이라도 추궁할 일이 있으면 어려워할 것 없이 체포하여 결박하라’ 하면서 영읍(營邑)의 명령을 아이들 장난처럼 보고 있네. 그가 워엄과 복을 스스로 만들어 발이 도리어 위를 차지한 격이라 기강과 명분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니 나라가 나라꼴이 아니네. 묘당(廟堂)은 어찌 영칙(令飭)이 없는 것인가? 이미 한우리은행 예금담보대출
달 남짓이 지나는 동안 온갖 변고가 있는데도 아직도 움직일 기미가 없으니, 만약 그대로 내버려 둔다면 장차 농사(農事)를 폐할 것이고, 비록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장차 그것을 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네”  즉 황영수 큰형이 보기에 1894년 4월 당시 충청도 옥천지역에서도 동학농민군들의 세력이 매우 강력했으며 이에 대해 양반들이 대적할현대저축은행 대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즉 아랫마을의 행랑에 동학농민군들이 모임을 가졌고 이에 대해 양반들이 어떤 조치도 하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동학농민군들이 활동이 그동안 유지되어 왔던 조선이라는 체제에 반하는 것으로 매우 잘못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국가의 기강이 무너지고 있다고 한탄하면서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를 동생에게 보낸 편지카드연체기준
에서 표현하고 있다.   1894년 4월 20일 편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4월 20일 보낸 편지에서는 그동안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과는 다른 내용을 포무직자통신연체대출
함하고 있다. “동학의 무리들의 소요는 모두 수포(搜捕:색출해 체포함)에 겁먹어 배도(背道)하고 귀화한다고 하였네. 그리하여 그 수괴만 주벌하고 그 아랫사람들은 풀어 주었는데, 군기(軍器)를 탈취하는 변고를 일으킨 박운(薄雲)의 세 수괴(강채서, 최명기, 이일선)는 아직 잡지 못하였다네. 순사(巡使)의 뜻은 무마(撫摩)를 위주로 하지만 지금 만약 엄히 다스마이크레딧 무료신용조회
리지 않으면 반드시 다시 봉기할 우려가 있네. 만약 다시 봉기한다면 전보다 심할 것이니 이것이 크게 우려가 되는 부분이라네. 고부(古阜)의 적세(賊勢)가 매우 성대하다고 하는데, 뒤이어 전보(電報)가 있었는가? 이는 마을 낭정(廊丁)이 수성군(守城軍)으로서 자세히 조사하여 보내준 것으로 난리 가운데의 일 아님이 없으니 어찌해야 하겠는가? 지금 듣자니 공주(公州)의 군대가 들어가고 단지 청주(淸州)의 군대만 있다고 하며, 부상(負商)은 지패(紙牌)로 일을 행한다고 하네.” 즉 편지를 보낸 시점은 1894년 4월 20일인데, 충청도 옥천과 인근지역에서도 매우 활발하게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전개되었음이 확인된다는 것이다. 1차 봉기 과정에서 충청도 지역에서도 이에 호응하여 또는 자체적으로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군기를 탈취한 박운(薄雲)의 세 수괴인 강채서(姜采西)ㆍ최명기(崔明基)ㆍ이일선(李一善)을 아직 잡지 못하였다고 한 것은 이들이 이미 1894년 4월경에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동학농민군 지도자로서  충청도 옥천과 인근지역에서 군기를 탈취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그동안 1차 봉기에서는 충청도에서 호응하지 않았다는 일반적인 견해는 제고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강채서, 최명기, 이일선은 충청도 옥천, 유성을 기반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특히 강채서는 전봉준이 공주를 공격할 때 함께 했으며, 최명기는 동학농민혁명 이후에까지 천도교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1894년 5월 9일 편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1894년 5월 9일 보낸 편지에서는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동학농민혁명 전개과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음이 확인된다.“완산부(完山府)의 성이 함락되었으니 참으로 큰 변고일세. 도백(道伯)과 반자(半刺)가 혼비백산하여 도망간 것을 다른 나라에 들리게 해서는 안 되는데, 이로부터 절개를 세워 의리에 죽는 사람은 말단의 직임에서 나온다는 것을 알았네. 최근의 전보(電報)는 어떠한가? 신임 도백은 이미 임지에 부임하였다고 하는가? 동학의 무리들은 기운을 기르고 있을 뿐이지 조금도 징계하여 고칠 뜻이 없으니 통탄스럽네” 이 편지에서는 전주성이 동학농민군에게 함락되고 감사와 판관이 도망하였다는 것에 대해 매우 부끄럽게 생각하여 이러한 사실이 다른나라에 알려지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 오히려 말단 관리들이 의리를 지키고 있음을 칭송하고 있다. 그러면서 동생에게 중앙에서 알수 있는 전개과정이나 전투상황 또는 관찰사가 임명되었는지 등의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즉 당시 지식인들이 동학농민군들의 활동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면서도 전개과정을 매우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1894년 5월말경 편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마지막으로 1894년 5월말경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편지에서도 동학농민혁명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본읍의 군기(軍器)를 탈취당한 후에 공주와 청주 두 영(營)의 병사가 잡아간 도당(徒黨)들을 내보낸 것은 두 영에서 곤장을 한 대도 때리지 않고 모두 풀어준 것이니, 이는 비록 살리기를 좋아하는 덕이지만 악행을 징벌하는 뜻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 무리들이 처음에는 비록 위축되어 굴복하였지만, 지금은 의기양양하고, 처음에는 배도(背道) 하겠다고 말했던 자들이 지금은 예전으로 돌아갔다네. 또한 입도(入道)하는 자가 많이 있고 또 몰래 사통(私通)을 돌리는 자가 있다고 하니 통탄스럽고 패악스럽다 할 만하네. 사람들이 모두들 다시 봉기할 것이라고 하는데, 만약 다시 일어난다면 반드시 살육이 있게 될 것이네. 이곳에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되는데 무릉도원을 아스라이 생각하고 내 신세 곤궁함을 스스로 탄식할 뿐이니 장차 어찌해야 하겠는가?” 이 편지에서는 1894년 5월 충청도 지역에서 동학농민군들에 대한 처벌이 매우 미약하였다고 지적하였고, 반면에 동학농민군들의 세력이 매우 강성해질 것을 우려하면서 본인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될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다. 이 편지에서는 이와 함께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들이 전주성 입성 이후 전개된 완산전투에서 농민군이 패한 상황에 대해서도 소상하게 기록하고 있다. “완산부(完山府)의 도적들이 나가고 초토사(招討使)의 관문(關文)을 보니, 우두머리인 김순명(金順明)과 14세 소년 장사 이복롱(李福弄)을 체포하여 죽였으며, 또 적병 500여명을 죽이고 총과 창 300여 자루를 확득하였으며 장차 머지 않아 성을 수복할 것이라고 하네. 너무나 다행스러운 일이네. 이 근처의 도당들이 이 관문을 보고 크게 기뻐하지 않는 기색이 있었다고 하니, 그 뜻이 매우 음흉하네. 그들의 도(道)를 그들만이 행하여 다른 사람들을 유혹함이 없고 협박함이 없으며 입도함에 작당(作黨) 함이 없고 다른 사람들을 해함이 없이 한쪽에 거처하면서 행한다면, 이단의 무리로 구별하여 서로 상관하지 않을 뿐이니 그렇다면 어찌 오늘날의 변고가 있겠는가?” 동학농민군의 전주성 입성 이후 완산을 비롯한 전주성 인근에서 관군과 동학농민군의 치열한 접전이 있었고, 여기에서 농민군이 많은 타격을 입었는데 이에 대해 매우 상세하게 그 상황을 파악하여 기술하고 있다. 특히 그는 동학농민군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도록 해야한다는 확고한 신념을 표현하고 있다. 그는 이러한 자기의 생각을 서울에서 관리로 있는 동생에게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이를 실천하고자 했으며 아마도 자신의 생각을 동생에게도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의도로 계속적으로 동생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 아닌가 싶다. 이 편지를 쓴 황영수의 큰형은 당시 조선에 있는 양반 지식인의 가장 표준적인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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